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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재문(如在門)

인동장씨 여헌종택(仁同張氏 旅軒宗宅)

40.0x132.0x9.3 / 초서(草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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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여재문(如在門)
  • 글자체 초서(草書)
  • 크기 40.0x132.0x9.3
  • 건물명 여재문(如在門)
  • 공간명 인동장씨 여헌종택(仁同張氏 旅軒宗宅)
  • 서예가
  • 위치정보 구미시 인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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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재문(如在門)

여재문(如在門)


여재문(如在門)은 경상북도 구미시 인의동에 있는 여헌(旅軒)종택 사당의 출입문에 걸려 있던 편액으로 추정된다. ‘여재’는 선조에게 제사를 지낼 때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지극한 효로 선조가 마치 눈앞에 계신 것과 같이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뜻이다. 『논어』, 「팔일八佾」에 “선조에게 제사 지낼 때는 선조가 살아 계신 듯이 하셨고, 신에게 제사 지낼 때는 신이 있는 것처럼 하셨다. [祭如在 祭神如神在]”라고 하였다. 또 『중용』 16장에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재계하고 정결히 하며 성대하게 제복을 차려 입고서 제사를 받들게 한다. 그리고 자신은 양양하게 위에 있는 듯하고 좌우에 있는 듯하다. [使天下之人 齊明盛服 以承祭祀 洋洋乎如在其上 如在其左右]”라며 돌아가신 선조에게 정성을 다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편액의 필획이 두텁다. 내부공간을 긴밀하게 구성하고 있다. 여(如)에서 女부분의 공간을 작게 하고 口를 크게 하였고 在(재)에서 좌 삐침은 크게, 土는 작게 하였다. 門(문)에서 생략 자형을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은 如(여)와 在(재)에서 어느 정도 긴밀함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門(문)에서 복잡함은 없어지고 긴밀함은 얻었다. 전체적으로 단순함으로 통일된 자형이 간결하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인동장씨 여헌종택(仁同張氏 旅軒宗宅) 소개


인동장씨(仁同張氏) 여헌종택은 고려 때 벽상공신에 책록된 신호위 상장군 장금용(張金用)의 후손이다. 그 후손들이 옥산에 정착하여 본관을 옥산(玉山)으로 삼았다가 옥산이 인동으로 개칭됨에 따라 인동이 관향이 되었다. 고려 말 장안세(張安世)는 함흥부윤과 덕녕부윤을 지냈는데, 함흥부윤으로 재직할 때 치수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홍수의 범람을 막았으며 만세교라는 70여 칸 규모의 큰 다리를 세웠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개국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은거하였다. 이런 절의로 인하여 그는 별세 후 수백 년이 지난 1834년(순조 34) 충정(忠貞)이란 시호를 받았고 세상에서 이른바 두문동 72현의 한 분으로 추앙되었다.

장안세의 손자 장수(張脩)는 조선조의 벼슬에 나아가 사헌부장령 등을 역임하였는데, 부친이나 조부와 달리 그가 조선조의 벼슬에 나간 것은 아버지의 권유 때문이었다. 성품이 매우 강직하였던 장수는 거침없이 바른 말을 하며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했으나 여의치 않아 고향으로 돌아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장보(張俌)와 장우(張俁) 두 아들을 두었는데, 둘째 장우가 바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의 5대조이다. 장우는 인동장씨 남산파의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인동장씨들이 옥산을 중심으로 한 인동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시조 장금용 때부터지만, 인동장씨 가운데 한 파인 남산파가 현재 종택이 위치하는 인동 남산 아래에 자리 잡은 것은 장우 때부터이기 때문이다. 장우의 아들 장승량(張承良)은 부친이 터를 잡아 놓은 남산을 떠나 성주 암포(지금의 성주군 월항면 안포리)로 이주하였는데, 남산파가 암포와 인연을 맺은 것은 장승량의 조부인 장수가 암포에 살던 판양양부사 이번(李蕃)의 딸과 혼인을 하면서부터이다. 성주 암포로 이주하였던 남산파가 다시 인동 남산으로 돌아온 것은 장승량의 증손 장렬(張烈) 때이다.

장렬은 증조부 장승량이 서울에서 내금위 어모장군으로 있던 시절에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하였다. 20세가 된 뒤 성주 암포로 귀향하였다가 암포의 근거지를 아우 장희(張熙)에게 맡기고 다시 옛날에 살던 인동 남산으로 거처를 옮겨 남산파의 터전을 다시 닦았다. 여헌의 부친인 그는 죽정(竹亭) 장잠(張潛)과 함께 집안 간의 계를 만들고 족보를 편찬했으며 선조 묘소에 제사를 지내고 집안 간 친목을 도모하였다. 뿐만 아니라 매월 초하루마다 자제들을 이끌고 학문을 강론하고 암송함으로써 집안의 학문·문화적 위상을 높이는 데도 노력을 기울였다.

장현광의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 본관은 인동(仁同)이며 부친은 장렬, 모친은 경산이씨(京山李氏) 이팽석(李彭錫)의 딸이다. 그는 인동에서 성장하였으며 어려서 학거(鶴渠) 장순(張峋, 1532~1571)에게 배웠다. 장순은 장현광의 11촌 숙부로 학행이 독실하여 명성이 있었기에 장현광이 학자로 대성하는 데 큰 역할은 하였다. 장현광은 15~16세 때 장순이 갖고 있던 『성리대전性理大全』, 「황극편皇極篇」을 차람하면서 학문에 더욱 빠져들어 독학하였다. 장현광을 두고 불유사승(不由師承)이라 하여 뚜렷한 사승관계가 없다고 인식하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독학의 결과 그는 18세에 「우주요괄첩宇宙要括帖」을 짓는데, 이 가운데 제10첩 ‘반궁첩(反躬帖)’의 “능히 천하의 제일 사업을 본받는 자가 바로 천하의 제일 인물이다.”라는 구절을 보아 학자로서의 포부를 알 수 있다. 1591년(선조 24) 모부인의 상중에 전옥서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594년(선조 27) 예빈시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다음 해 보은현감에 제수되어 부임하였지만 여러 번 사직을 청한 뒤 허락받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군현에 통문을 보내 의병을 일으키게 하고 군량미를 모아 보냈다. 그러나 1637년(인조 15)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영천 땅 입암(지금의 포항시 죽장면 입암리)으로 들어가 반년을 지내다가 그해 9월 6일 경제당 만욱재에서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

여헌 등 조상의 신주를 모시고 있는 사당은 모원당, 청천당과 함께 2000년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90호로 일괄 지정되었다. 원래 1650년(효종 1) 세워졌다고 하지만, 현존하는 사당은 모원당, 청천당과 함께 2005년 완전 해체하고 새로 지은 것이다.

참고문헌
  • 장현광, 「모원당기」 『여헌집』 권9.
  • 최석기, 『한국 경학가 사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98.
  • 이종문, 『모원동 회화나무, 구미 여헌 장현광 종가』,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11.
  • 『편액』, 한국국학진흥원, 2013.